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1 운동 (문단 편집) == 배경 ==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에게 [[대한제국]]이 [[경술국치|강제합병]]당한 후 조선은 일본 제국의 무단 통치에 신음하고 있었다. 교사들까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했을 정도[* 이 부분은 무단 통치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히지만 사실 당시 일본에선 일본 본토와 한반도를 막론하고 모든 공무원들이 제복을 입고 칼을 차도록 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그것을 따랐을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비슷한 예로 [[프로이센 왕국]] → [[독일제국]]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역시 외교관에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잘 알려져 있다.]였고 [[일본 육군]] [[일본 제국 육군/헌병|헌병]]이 [[경찰]]보다 훨씬 많이 주둔하는 헌병 경찰 제도[* 당시 일본 육군 헌병은 민간에 대해 경찰권 행사가 가능했고 본토 내지인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본토는 치안 업무의 주력이 경찰이었고 헌병은 소수였으나 한반도는 그 비율이 역전되어 더 분위기가 험악했다.]로 집회와 단체 운동을 일절 엄금했다. [[1910년대]] 일제 치하에서도 지주와 소작농 관계는 이전에 비해서도 되려 악화되었고 토지정리사업도 농민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돌아갔으며 경제 사정은 나날이 악화일로로 치달아서 물가 상승률은 매년 2자릿수대를 기록했다. 여기에 [[1918년]] 일본에서 큰 [[흉년]]이 들어 [[쌀 소동]]이 터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조선에서 쌀을 더욱 공출하면서 자연히 농민들의 불만이 더욱 고조되었고 부두를 중심으로 일하던 노동자들의 생활고는 악화되었다. 더군다나 1910년대 후반에 일본 자본들이 쌀 시장에 대대적으로 유입되면서 투기 바람이 불었는데 그 결과 쌀값은 1917년 기준으로 10원대 중후반이었던 것이 3배 가량 폭등하여 1919년 3.1 운동을 앞두고 43원 57전까지 올라 버렸다. 이러한 쌀값 폭등에 대해서 조선 총독부는 대책을 제대로 내놓지 않은 채 무능함만 드러냈으며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소작농들은 쌀값이 폭등한다고 한들 제대로 이득을 본 것도 아닌지라 민생고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또 189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이 꾸준히 있어 왔지만 결국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전부 좌절되면서 희망을 잃은 조선인들이 늘어났는데 이 때문에 매 해 상당수의 사람들이 조선을 떠나 [[중국]] 동북부와 [[러시아]]의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로 이주해 나갔다. 또 일제는 1918년 말에 들이닥친 [[스페인 독감]]에 대해서도 검역을 부실하게 하고 (당시 의학 이론과 의료기술을 기준으로) 제대로 된 위생•의료 대책도 전혀 내놓지 않았으면서[* [[스페인 독감]] 문서에 잘 나와 있듯 유럽 각국이나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감염 확산을 억제하고자 여러 공중보건 조치들을 취했다. 반면 일제는 그것조차 제대로 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망자가 속출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중들의 영양•위생 상태가 엉망이 되어 면역력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밀가루가 없어서 순무로 빵을 만들어 먹어야 했을 정도였다.] [[독감]]이 퍼질 대로 퍼진 원인을 조선인들의 생활 습관만으로 돌리며 책임전가에 급급한 무능함과 뻔뻔함을 나타냈다. 조선인들의 영양•위생 상태가 그렇게 엉망이 되어 면역력이 떨어지게 된 까닭은 바로 자기네들이 가혹한 수탈을 저질렀기 때문인데도 말이다! 비록 스페인 독감은 12월경에 잠잠해졌지만 그 와중에 십수만 가량의 사망자가 나왔음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무능함과 그간의 폭압에 대한 분노가 조선인들 사이에서 번져나갔다. 이런 가운데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14개조의 전후 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이른바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평의회 의장이었던 [[블라디미르 레닌]] 역시 [[제국주의]] 반대의 일환으로 민족 자결을 주장하는 등 세계에서 민족주의 운동에 힘을 싣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하지만 윌슨을 비롯한 승전국은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등 패전국과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전선에서 이탈한 러시아의 [[식민지]]에 독립 의사를 강화시켜 패전국을 약화시키는 게 목적이었을 뿐 진정한 세계 피지배 민족들의 자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당연히 여기서 (미국 자신들을 포함해) 승전국의 식민지는 뺐다. 즉, 당시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애당초 해당 사항이 아니었으므로 조선 같은 협상국의 식민지들 입장에서는 위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반면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는 이념적 특성상 진정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에서 기인한 것이었으며 이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회의와 극동인민대표대회의 식민지에 대한 극명한 태도 차이로 다시 한 번 나타난다.] 특히 당시 중국에 유학 중이었던 신한청년당 당수인 [[여운형]]은 이 선언과 뒤이은 [[파리 강화 회의]]가 조선 독립의 달성 여부를 떠나서 앞으로 조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신한청년당]]'''이라는 단체를 문서상으로 조직해 파리 강화 회의에 [[영어]]를 잘하는 [[김규식]]을 파견하고 조선 쪽에는 [[일본어]]에 능한 [[장덕수]]를 보냈다. 이러한 소식은 조선 안팎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상당히 고무하는 소식이었다. 이렇듯 일제의 실정이 반복되고 독립 열망이 고조되던 차에 '''1919년 1월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 1907년 일본에게 강제 퇴위되었고 1910년 이후 황제에서 이태왕으로 격하되어 [[덕수궁]]에서 거주하고 있었다.]가 사망'''했다. 당시는 아직 [[대한제국]]이 멸망한 지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옛 군주의 상징적 무게감이 적지 않았고 그에 따라 민심은 극도로 격앙되었다. 뭣보다 일본이 억지로 앉힌 [[순종(대한제국)|순종]]과는 달리 고종은 좋든 싫든 조선~한국인 모두가 인정한 군주였다. 이런 군주가 비명횡사했으니 [[반일]] 감정이 격앙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고종은 60세가 넘었음에도 아들인 [[순종(대한제국)|순종]]보다도 건강했기 때문에 고종의 급작스런 죽음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사무관인 곤도 시로스케는 고종이 중태라는 소식을 듣고는 '고종이 아니라 순종이 위독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을 정도로 당시 고종의 건강은 전혀 우려 사안이 아니었다.] 고종의 사망 원인은 공식적으로 [[뇌일혈]]로 발표되었으나 세간에는 [[이완용]]이 일본의 사주를 받아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반일 분위기는 더욱 고양되었다. 고종의 독살 여부에 관해서는 현재도 학계조차 역사적 실재라는 견해와 그렇지 않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점은 고종 사망 당시에는 독살설이 기정사실로 널리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독살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고종의 사망 소식은 하루 뒤인 1월 22일에 발표되었고 그동안 서거 사실은 발표되지 않았으나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오히려 민심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총독부는 뒤늦게 언론을 통해 해명 및 반박 기사를 내며 고종의 독살설을 무마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고종이 불미스러운 일로 사망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1918년에는 만주에서 [[대종교]] 인사를 중심으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학생들의 주도로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 [[YMCA]] 강당에서 [[2.8 독립 선언]]이 발표되었다. 선언 직전 조선 유학생이었던 송계백은 인쇄 비용을 구하기 위해 조선으로 잠입하였고 모교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학교]]의 은사이자 [[중앙고등학교|중앙학교]] 교사였던 [[현상윤]]을 만났다. 송계백으로부터 거사 계획을 들은 현상윤은 보성학교 [[최린]] 교장과 중앙학교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교장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 이들은 [[천도교]]의 수장인 [[손병희]]를 찾아가게 되었다.[* [[http://news.donga.com/3/all/20180505/89944337/1|동아일보, 중앙학교 숙직실, 3·1운동 모의 기지로... 밤마다 비밀 회합]], [[http://news.donga.com/3/all/20180519/90151654/1|동아일보, "천도교-기독교 힘 합칩시다"... 초유의 종교연대 운동 성사]]] 이미 [[천도교]]에서는 오래 전부터 [[동학농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전국민적인 독립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천도교는 처음에는 구 대한제국의 정치인들과의 연대를 모색했으나 이들이 소극적으로 나오자 [[개신교]], [[불교]]와의 연대로 방향을 전환했다. 개신교에서는 [[평안도]] 지방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제에 의해 일제 검거된 소위 [[105인 사건]] 등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이 고조되었는데 관서 지방의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였던 이승훈이 천도교 측과 접촉하여 운동에 참여하기로 한 가운데 개신교 학교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불교 또한 한용운을 중심으로 반일 분위기가 있었고 최린이 한용운과 접촉하여 불교와의 연대도 성사되었다. 그러나 한용운이 추진한 유림과의 연대는 무산되었다. 원래 유림 세력도 3.1 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로 했으나 사정이 생겨서 유림 대표 김창숙, 김정호는 모친의 와병으로 늦게 도착하여 서명할 기회를 놓쳤다.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들의 이름이 없는 것을 안 유림 대표들은 막대한 죄를 지었다며 바닥에서 뒹굴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러자 군중들이 '''"이놈아, 통곡은 왜 하느냐. 나라를 망칠 때는 너희 놈들이 온갖 죄악은 다 지어놓고 오늘날 민족적 독립 운동에는 한 놈도 끼지 아니하였으니. 이놈아, 이러고도 다시 유림이라 오만하게 자부하려느냐?"'''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멸시했다. 이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김창숙 등은 파리 평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내 이 수치를 씻자고 제의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3.1 운동에 대한 부채 의식을 가진 유림 세력의 최후의 몸부림이 면우 곽종석을 중심으로 시작된 1919년의 [[파리 장서 사건]]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국내 유림의 편지를 보내 독립을 호소하기로 한 것이다. 간재 [[전우(학자)|전우]]를 비롯해서 외적을 데려와 외적을 물리치는 일이나 머리 깎은 자들의 복국 운동이나 유림으로서 할 짓이 못 된다고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기뻐하며 참여한 유림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일본에 의해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간다. 곽종석 등 여러 유림들이 투옥되었다가 순국했다. 이와는 별개로 운동 직전에 일본 측에게 들통날 뻔한 위기가 한 차례 있었다. 천도교 측에서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도중 [[서울종로경찰서|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이 이를 발견한 것. 그러자 민족 대표 중 하나였던 [[최린]]이 신철을 만나서 돈을 주며 "당신은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고 묻고 "제발 며칠간만 입을 다물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한다. 돈을 받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돈을 건넨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그 액수에 따라서 전문가들의 의견이 갈린다. 단기간에 많은 돈을 줄 수 없기에 시간을 두고 전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신철이 이를 묵인한 것은 사실이며 이후 신철은 체포령이 떨어지자 유치장에서 숨겨뒀던 [[청산가리]]로 [[자살]]했다.[* 다만 2019년 새로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신철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숨졌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1919년 당시 [[일본 경찰]]의 신철(신승희) [[사망진단서]]에 자택에서 모루히네([[모르핀]])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간 신철의 사망 사유로 알려진 유치장에서 숨겨둔 [[청산가리]]를 먹고 숨졌단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다. 당시 [[매일신보]]의 보도는 신철이 뇌물수수로 조사를 받던 중 [[유치장]]에서 [[자살]]했다고 말했는데 공식 기록은 다르게 말했다는 것. 관련 연구자는 공식 기록대로면 체포한 지 하루만에 풀어주어 집에서 자살했다는 것인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윤치호 일기는 윤치호가 "일본 경찰에게 '신철이 고문 받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즉, 신철의 사망에 대한 [[일본 경찰]]의 공식 기록은 사실과는 다를 가능성이 높으며 그 이유는 신철이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을 가능성 때문이라는 것.] 아이러니한 점은 정작 신철에게 "당신은 조선 사람이냐"고 묻던 그 최린은 훗날 변절하여 [[내선일체]]의 선봉장으로서 한인 청년들에게 "너희들은 일본 사람"이라고 윽박지르는 [[뒤통수]]를 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